#2 공방전

“네아비! 어서!”

<……아니면 파멸! 영원히!>

“영원히!” “정면 응시!”

<바힛! 대열 정비! 다입! 기준점으로부터 각 3520! 백 보! 백 보! 응전 없이 빠르게 이동! 정면 응시!>

“정면 응시! 이동!”

“네아비 대오 이탈!”

“네아비!”

진군 시작과 함께 명령파와 독전파, 복창들이 이어지던 사이, 네아비는 자신을 부르는 외침을 뒤로하며 최대한 몸을 숙인 채 전열로부터 반대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쓰러져 아무렇게나 뒹구는 메젯의 잔해들이 밟혔다. 대부분이 적의 쳴라와 노이겔라였다. 주변에 스산한 그늘이 드리웠다. 공중에서 에우레노바 하나가 따라오고 있었다. 태양을 등진 놈의 얼굴 가운데 자리 잡은 눈이 새하얀 빛을 뿜었다.

<명령에 복종하라! 대오로 복귀하라!>

네아비는 들고 있던 파메아를 있는 힘껏 던졌다. 맞지 않았다. 가망 없는 일이었다. 더 빨리 달려야 했다. 그는 금색과 흰색이 섞인 사냐카 문장이 그려진 나투아를 벗어던졌다.

<복귀하라! 전장에서 도망치지 말 것이다! 경고한다! 전장 이탈은 즉시 심판이다! 네 책임은 가볍지 않다!>

빨리 하라지! 할 수만 있다면 네아비가 먼저 손을 쓸 것이었다. 닿을 수만 있다면. 가슴속을 찢는 듯한 명령파에 네아비의 발놀림은 더 빨라졌다. 가장 치열하고 끔찍했던 파제기스 공성전 때보다도 빨리, 달리면서 그는 손에 닿는 아무것이나 낚아챘다. 메젯의 잘린 손이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손은 없는 상대의 사고계를 미친 듯 찾아 헤맸다.

손에서 눈이 열리나 볼 영혼도 없고 보아 줄 영혼도 없다 두 번째 눈의 앞에서 입을 벌리는 것은 심연이다 거기 응답도 메아리도 없다 너무 깊은 그것은 하나의 장막이다 흠 없는 투명이 우리의 몸을 감싸며 풀어헤친다 나란한 너와 나를 구분치 못하게 하는 바람처럼, 바람이 쓰러뜨리는 판석처럼...

에우레노바 나그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아비는 공중의 날개 달린 적을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던졌다. 시체의 손은 에우레노바의 머리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천사가 중심을 잃고 공중에서 휘적이던 순간, 네아비는 전후처리를 위해 산처럼 쌓아놓은 시체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머리들, 몸통들, 사지들을 닥치는 대로 헤집고 들어갔다.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네아비의 몸을 마구 두드렸다. 어제만 해도 네아비와 서로 붙들고 씨름을 하던 손발들이었는지도 몰랐다. 마구 허우적대던 손에 걸리는 나투아가 있어 필사적으로 뒤집어썼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이제 바깥에서 파르스름한 열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가? 아직? 아직인가? 그제야 전신의 관절과 근육에 피로가 물려왔다. 과부하에 걸린 신경마디 하나하나가 울부짖었다. 둔중한 폭발음이 들린 것 같았다. 공포 속에서 네아비는 모든 감각선을 닫았다. 그를 둘러싼 좁은 공간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그 순간 오직 살테만이 그가 점유한 공간의 전부였다. 파괴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기억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파괴의 기억뿐이었다. 아니, 언젠가 뭔가를 만들어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헤아려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병사가 되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의 살테를 증오했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잠들지 말 것이다. 잠들지 말 것…….

네아비의 정신은 자신이 처음 태어난 날로 날아갔다. 일군의 에테노이람들이 주먹만 한 크기의 빛나는 살테를 모래 속에서 드디어 캐낸다. 햇살을 맞은 살테가 주변으로 이채로운 빛을 뿌린다. 있을 리 없는 기억, 농장에서 수확되던 기억? 어쩌면 구경했던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만큼은 그 기억이 생생하다. 여러 적법한 의식이 치러진 뒤, 그의 살테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세대’로 옮겨진다. 세대의 작고 누추한 집에서도 촛불을 켜놓고 작은 의식이 열린다. 두 에테노이람은 매일 아침 일을 나가기 전 그의 살테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밤이 되면 자신들의 먼지투성이 몸을 나투아로 정성껏 닦은 뒤 새로운 몸을 만드는 일에 매진한다. 몸의 왼편을 만드는 쪽은 오르사리, 오른편을 만드는 쪽은 이리파다. 새 몸을 만들려면 해가 다섯 번 바뀌어야 하고, 그동안 두 에테노이람은 새로운 몸 속으로 점점 파묻혀 가는 살테를 향해 말을 건다. 그때 그들이 뭐라고 했지? 떠오르지 않는 것을 떠올리려 애쓰면서, 네아비는 지금을 향해 튕겨져 나온다. 작고 따뜻했던 세대에서 시체들 틈바구니의 어둠 속으로. 아직인가? 아직?

그 손을 뻗어 구해주시옵소서, 부서지지 않게 해주시옵고, 살려주시옵고, 뭐든지 하겠나이다, 뭐든, 지금 나를 살려만 주신다면, 당신을 무한히 따르겠나이다, 죽지 않게만 해주시옵소서, 거기 있다면, 이리우쯔나스께... 간하오니... 무한히... 영원히 따르겠나이다...

최후가 너무 길다. 네아비는 어느샌가 기도를 외고 있었다. 덕분이었는지 공포는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어째서인지 아까 집어 들었던 손의 이미지가 그를 덮쳐 누른다. 그 손의 후방은 온통 암흑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의 몸 전체에 다시 싸늘한 떨림이 퍼져나갔다. 죽음이다. 그것이 죽음이었다. 어쩌면 이미 죽은 걸까? 죽어서 기도를 외고 있는 걸까?

무슨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 개의 손이 비집고 들어와 그를 힘차게 밖으로 끌어냈다. 눈을 떴다. 가장 먼저 한 손에 사라스, 다른 한 손에 에우레노바의 머리를 든 메젯이 보였다. 검푸른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키를 보아서는 무헬 같았다. 그 주변엔 몇인가 노일이 더 있었다. 뒤쪽에 머리를 잃고 떨어진 천사의 몸뚱이가 보였다. 시체 옆에는 낯선 모습의 메젯이 서 있었다. 하지만 처음은 아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전장에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형상이었다. 투구도 갑옷도 없이, 머리장식도 없이. 그것은 검푸른 에테노이람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이발쯔는 그때 그 장면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