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알았어 네가 뭘 하려는 건지. 일터에서 알아 버렸어. 들어봐.

뭘 알았는데?

너를 내 손주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그렇지?

뭐?

후손이 되려는 거지? 아니면, 후손인 거지? 네가?

무슨 소리야? 머리가 이상해졌어?

어? 당연하지... 그래 머리가 이상해졌지... 당연히 난 머리가 이상해졌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머리가? 머리가 이상해진다는 건 없어. 오... 어떻게... 머리통은 그런 게 아니야. 이 세계가 머리통이야. 이해하지 않아? 나도 너한테 배운 거나 다름이 없어.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았다면 이상한 거야... 이런 곳에서... 너마저 그러면...

아니, 알아. 나도 알아 그건. 친구처럼 느껴져서 말해 본 거야. 친구끼리는 이렇게도 말하지 않아? 그래 농담, 농담이라고. 머리가 이상해진 쪽은 나야. 아니 잘못한 쪽은.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글쎄 내 말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거야. 후손 운운하는 거. 인간에게는 그런 뜻인 거야? 내가 하려는 일이?

네가 하려는 일이...

내가 하려는 일이 뭔데?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인 것 같아.

그게 어떤 뜻인지 모르겠어. 후손이 된다는 게.

이런 거야. 만약 오늘날에, 이곳에서, 내가 아이를 낳기로 맘먹는다면 그건 무슨 뜻일까, 어떻게 가능할까, 왜일까? 한 가지 이유밖에는 없는 거야. 그 아이를 내 앞세대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야. 그것 말고 다른 까닭은 없어. 이 세상에 나의 아이가 있어야 할 이유가. 그것만 이유인 거야. 오직 그것만이야. 나한테는.

너한테는.

아기를 들고 가서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야. 내 앞세대에게. 그들은 좋아할 거야. 자신들의 아이가 아이를 낳게 하려고 그들은 산 거야. 그들은 내 아이에게 까꿍 하고 우르르 할 거야. 그거야. 그뿐이야. 그들이 그 일을 위해 살았던 거야. 그거면 된 거야. 그 이유라면 지금, 여기서도, 나는 낳을 수 있어.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는 없어. 그리고 아마 나도 알게 될지 몰라. 또한 나도, 실은 낳게 하려고 낳았다는 걸. 내가 우르르 하고 또 까꿍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용납할 수 있겠어? 어때?

그게 내가 하려는 일이라고? 그 아기가 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야? 누가 나를 낳았다는 거야? 낳는다는 거야?

네가! 만약 유일한 것이 되려는 생각을 버린다면... 원래 지닌 적도 없다면, 버리게 하려고 든다면... 시간을...

좋아. 알 수 있을 것 같아. 기억해 둘게. 나도 실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어. 내가 하려는 일이, 내가 되려는 것이. 말하자면 나는 과일잼이야. 나는 과거로 내파될 거야. 나는 문자야. 어때?

원... 머리가 이상해졌어?

웃겨. 얘기나 해줘.

나도 기억해 둘게. 너는 과일잼이야. 무슨 소리지? 병에 담겨야 한다는 거야? 삶은 유리병에? 아니면 과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야? 맞아. 좋아. 좋은 얘기야. 내 얘기도 그런 거였어. 오늘은, 원래 마지막에 하려고 했던 얘기가 있는데, 오늘 할게. 아껴둔 거야. 그냥 오늘 해도 될 것 같아.

난 내 인간성이 대략 열다섯 정도에 한 번 끊어진 거 같다고 느껴 왔어. 그러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 즈음에는 그냥 가루가 돼 버린 거 같았지. 내 할머니들처럼.

인간성 말이야. 여러 뜻인데... 내가 하려던 말은, 내가 인간인 것 같은 느낌 말이야. 그래. 그게 열다섯에 끊어진 것 같았다고. 하지만 분명 그 전에... 열다섯이 되기 전에, 그 전부터도 뭔가 있었던 거 같았어. 너덜너덜했다고. 그게 뭐 때문이었을까 생각해 봤어. 뭘까? 열다섯이 되기 전에...

가족이나 친척들이 엄청난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걸 지켜봤던 일이었을까? 옆에서 내 또래의 친척은 울고 있었고... 아니면 교회와 연관이 있었을까? 거기서 당했던 일? 아니면 학교? 아이들이 어디까지 무자비해질 수 있는지, 괴롭힘을 구경했던 일? 그 아이들이 되었던 일? 맞았던 일이나 때렸던 일? 그 일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가랑이를 핥았던 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었던 일?

다 아니야. 그건 나를 인간이 되게 만들어 줬던 일에 가까웠던 것 같아. 어떤 식으로든. 그러면 부숴 버렸던 건 언제였을까. 뭐였을까, 열심히 기억을 뒤져 봤고, 내 생각엔 이 일이야. 이 일이 나와 인간 사이에 처음으로 뭔가가, 인간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던 일이야. 잘 들어 줘.

그 동네에서 딱 1년 학교를 다녔어. 그다음엔 가족이 수도를 떠나 이사했고. 그러니까 그 동네에서 마지막 기억은 학교에 다녔던 일이지. 그 1년은 신기할 정도로 기억에 없어. 거의 전혀. 아니, 아버지와 공놀이했던 걸 빼면 말이야. 그거 빼고, 학교에서 일 중에 기억나는 건 하나뿐이라고 해도 좋아. 그게 그 일이야.

학교는 기슭에서부터 언덕배기를 향해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었어. 언덕에 등을 대고 누운 것처럼. 정문은 시장 쪽으로 나 있었고. 정문을 나서면 골목에 문방구들, 분식집... 시장 얘기는 했었지? 아, 공놀이 때 학교 얘기도 했던가? 학교 건물은 두 채 아니면 세 채였던 것 같아. 그때는 아이들이란 것도 많았어. 마흔 명씩 한 반, 한 학년에 열 몇 개 반, 오전반에 오후반에... 저학년이 쓰는 건물은 정문 들어서자마자 운동장과 면해 있었고 고학년 건물은 언덕 위쪽에 있어서 긴 계단을 올라야 했어. 그리고 후문이 그쪽에 있었다. 우리집에서는 후문이 가까웠지. 거의 코 닿을 정도로.

1학년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이 아이들을 정문까지 데려다준다. 길게 줄지어서 선생님을 따라가. 근데 나는 정문으로 가면 빙 돌아가는 셈이었어. 집에서 더 멀어지는 거였지. 후문으로 가면 금방인데. 애초에 등교할 때도 후문으로 들어갔거든. 그래서 선생님한테 그냥 후문으로 가도 되냐고 물어 봤던 것 같아. 집이 후문에서 더 가까운데 후문으로 가도 되나요? 두어 번은 누가 나를 데려다준 거 같아. 잘 모르겠어. 아닌가? 어쨌든 나는 허락을 받았어. 혼자 후문으로 해서 집에 가도 된다는 허락.

가끔 후문까지 갔는데 잠겨 있는 때도 있었어. 언제 잠기고 열리는지 왜 잠기는지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고. 처음 잠겨 있었을 때는 어? 하고 다시 정문으로 내려갔어. 학교에 두 번 오간 거나 마찬가지, 아주 긴 하교였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잠겨 있으면 그냥 문을 넘어갔어. 위로. 나 혼자만 거기로 다닌 건 아니어서, 나보다 한 학년이나 두 학년 위인 애들이 하는 걸 보고 망설이다가 나도 따라서 넘은 거야. 가방을 먼저 던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아득바득 넘었던 기억이 나.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종례는 끝나고 아이들은 복도에 줄 선다. 선생님 앞에. 나는 이제 인사하고 혼자 후문을 향해 가. 고학년 건물들이 있는 쪽으로. 계단은 두 번 올라야 했다. 두 번째 계단, 더 긴 계단을 오르기 전에 오른편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평평한 공간이 있었어. 아마 저학년 건물 뒤편이었던 것 같아. 기억에는 좀 어두컴컴했고. 세 방면이 막혀 있어 그냥 지나다니면서는 거의 갈 일이 없는 거기에, 토끼장과 새장이 있었다. 쪼그만 밭도 있었어. 옛날엔 그런 게 있었어. 토끼장. 당번들이 토끼들에게 밥을 줬어. 이제 그런 건 별로 없는 걸로 알아. 토끼들? 모르지. 내가 말하려는 건 새장이야. 그 새장에 공작새가 있었던 거야. 공작이 정말 있었나? 그게 정말 공작이었나? 나중에 생각해도 영 이상해서 찾아봤더니 옛날에 만들어진 학교에는 그런 게 있었다는 모양이야. 새장이랑, 닭, 칠면조, 공작. 하여튼 거기 공작이 있었어. 처음엔 몰랐지. 몰랐는데

어느 날 하굣길에는 계단을 오르려다 멈췄어. 귀에 익은 새 울음, 그리고 쏴아 쏴아 하고 꼭 나무에 바람 스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서. 여러 번 들었던 건데 어쩐지 그날은 지나가려다 멈췄어. 그게 무슨 소린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릴까? 그 소리는 새장 쪽에서 나고 있었어. 그냥 배경음이 아니라 정말 어디 가까운 데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고서. 그 전까지 거기서 나는 소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새장 쪽을 보니 거대한 뭔가의 그림자가 천천히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어. 멈칫멈칫 가 보니까, 당연히 가볼 수밖에 없었는데, 공작이 깃을 활짝 펼치고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 무슨 큰 새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러고 있는 건 처음 봤어. 그 빛깔... 깃털의 파랑 초록 노랑 눈알들... 새가 나를 보면서 깃털을 부르르 떨자 바람 부는 날 흔들리는 나무처럼 쏴아아... 하는 소리가 났다.

그 후로 나는 집에 갈 때마다 공작새가 있는 새장 앞에 꼭 들렀어. 공작은 깃을 펴는 때도 있었고 아닌 때도 있었다. 기다리다 보면 깃을 펴기도 했고, 우두커니 서있거나 머리를 저으면서 이리저리 오가기만 할 때도 있었어. 학교종이 울릴 때만 깃을 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어. 그 일이야. 내가 말하고 싶은 일이. 내 인간성이 처음으로 부서졌던 게 바로 그때라고 나는 생각해. 새장 속의 공작을 보면서야.어떻게 됐냐고? 몰라. 모르지. 아니, 아니, 다시 말해 볼게. 이상해. 더 잘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종례는 끝나고 아이들은 복도에 줄 선다. 선생님 앞에. 나는 이제 인사하고 혼자 후문을 향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