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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 일은 골똘히 더듬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다. 좋지 않은 꿈 같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사람을 죽여봤을지 모른다. 나는 언제였나? 봄이었나? 생각할 필요 없다. 덥다.

9/27

시체 옆에서. 썩는 냄새마저 반갑다. 그래도 문은 열어둠. 이걸로 일곱 명째. 약국(이었던 곳). 깨진 조각, 껍질들, 오물. 피? 똥? 이 사람은 고약한 갈색 자국이 되어 있다. 약 먹고 죽었는지 굶어 죽었는지 아니면 병 때문인지. 동전 몇 개. 나도 동전 몇개를 아직도 갖고 다닌다. 그 사실이 징그러움. 펜과 노트. 노트엔 ‘최후의 인간’ 너덧 번 필사. 재열의 메모가 붙은 버전이다. 맨 앞장에, 나는 처음 보는 붙임이 있다.

‘누가 이것을 썼는지 모른다. 내게 이것을 전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만 이것을 산 사람들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직 죽지 않을 것이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죽겠지만, 그렇지만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첫 문장. ‘아직 죽지 않을 것이다…’ 노트는 얇고 이미 꽤 뜯어낸 것 같다. 내 것들과 다른 종이지만 내용은 같음.

「최후의 인간」은 거의 소설처럼 보인다. 첫 번째 구원자에 대한 묘사는 내가 기억과 좀 다르고, 알기로는 그 사람이 첫 번째도 아니다. 소설이라면 이 지경에 누가 왜? 하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안다. 확신… 왜? 정말로는 누가? 재열의 메모도 좀 으스스하다. 재열은 재영이 죽인 걸로 보이는데 죽은 재영을 발견한 재열이 메모를 붙였다는 것은 뭘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엄연하다.

9/1

필사를 해보다 말았다. 다 무슨? 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죽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모두 죽어 있다. 내가 최후의 인간일 리 없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직, 제2의 재영이, 재열이 되어서는 안 된다(이건 우습다). 약국에 있던 시체는 의심의 절망 때문에 죽었을 것. 왜 조금 더 일찍 그와 만나지 못했을까. 누군가와 만난다면 반드시 함께 다녀야 한다. 나는 아직 죽지 않을 것이다.

9/15

여덟 번째. 오래되어 보이진 않지만 너무 말라 거의 해골. 뭔가가 이 사람을 보존했다? 그 옆에서 쓰고 있다. 그의 손은 장작 같은 회갈색이다. 뭔가가 그의 부패를 막은 것처럼 뭔가가 우리를 서로 만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건 아닐지? 이 사람은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있다. 커다란 가방을 껴안고. 안에는 필사된 「최후의 인간」 수십부. 헌사와 메모가 모두 붙은 버전이고 조금씩 다름. 그중 한 편에는 띄어 쓰고 붙여 쓰고 고쳐 쓰라는 교정 표시가 되어 있다. 하나씩 수집한 것 같다. 그런 가방을 지고서 시체들을 뒤지고 다니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기서 하나만 골라 갖고 전에 있던 건 다 버렸다. 좀 아까운 생각. 시체 옆에서, 한 번씩 다 훑어봤다. 각기 다른 글씨에 종이도 필기구도 다르다. 이들도, 나도 미쳐가는지 모른다. 안 미친다는 건 뭔가?

10/10

아마 최후의 인간은 이 나라에 돌고 있는 가장 유명한 글인 것 같다. 8월 이후 발견한 거의 모든 시체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라도. 어쩌면 외국에서도 그럴지 모른다. 국경 같은 건 의미 없는 지금이지만. 확인 방법 없음. 지금도 최후의 인간은 계속 늘어나고 있을 것. 이건 지독한 농담이다. 이게 읽힌다면 나도 죽었다는 뜻. 그렇지만 여러분을 위해.

10/22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손을 제외하면 이곳에 어떤 위협도 X. 여름이 끝나질 않는다.

11/29?

거의 죽을 뻔했다. 저번에 약을 구해서 다행이다. 이 날짜가 맞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침대. 이틀 아니면 사흘이다.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다시피해서 들어왔던 기억만. 이 방은 깨끗한 편. 꿈은 길고 평화로웠다. 옛날 일들. 적는 일에 한계. 아련함을 느꼈다고만 씀. 혹시 나는 내일 죽는 것이 아닌지? 이것이 읽히기를 바란다? 모르겠다. 아님. 뭔가 더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음. 단 한 명만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하경이 일기를 붙인다. 나는 내 이름은 절대 안 넣으려고 했는데,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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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잘 모를 때,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또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었던 때, 일테면 어릴 때,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래서 시간이 지난 다음 그 대가를 너무나 쓰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러야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