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인간

누가 이것을 썼는지 모른다. 내게 이것을 전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만 이것을 산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직 죽지 않을 것이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죽겠지만, 그렇지만 여러분을 위해.


아직 죽지 않을 것이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길이라니?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을 말하는 줄도 모르고 거짓말하고 있다. 재영은 재열에게 눈을 돌렸다. 재열은 활짝 웃고 있었다. 저 미소, 저 미소!

“멍청아, 넌 뭐가 그렇게 좋냐!”

“너만 괜히 뻗대고 있는 거야. 멍청이라니, 누가 누굴 보고?”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재영은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렀다. 이럴 수 없어! 아, 이럴 수 없다 정말! 이건 아니다! 이건! 그건 아닌가? 그러나 재열의 웃음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말인데 막상 너도 그 이야기엔 반박할 수 없잖아? 처음엔 누구나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하지만 봐봐, 나는 이렇게 기분이 좋고…… 한마디로 행복해. 어차피 우린 망해. 이게 바로 길인 거야. 나는 너도 행복하길 바라.”

재영의 얼굴이 경멸의 빛을 띠며 일그러졌다.

“그건 네 생각이 아니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누구도 혼자서 생각할 수는 없어. 생각은 모두의 것이고, 이건 결론이야. 네가 왜 거부하는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냐.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옳은 것이라면 받아들여야지. 너는 구원이니 뭐니 입에 달고 다녔잖아?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이 길을 먼저 발견하지 못한 거, 그게 네 거부의 유일한 이유로 보여. 어리게 굴지 마.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지. 누가 먼저 뭘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런 게 성숙이고, 바로 네가 말하던 구원―”

재영은 재열에게 달려들었다. 재열은 더 이상 소리 내지 못할 때까지 웃었다.


재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보도블록 사이로 돋아나는 선명한 연두색 싹들. 야트막한 산을 끼고 휘어져 사라지는 길에, 첫 번째 사람이 지나갔다. 두 번째 사람이 지나갔다. 그 뒤로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엔 여지없이 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들도 재열과 마찬가지로 시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시체를 만드는 시체들이었다. 재영은 블록 사이에서 돋아난 싹 하나를 뜯어내 엄지손톱을 세워 잘게 이겼다. 손끝에서 쓴 냄새가 났다.

주저앉은 재영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을 때 강아지 한 마리가 다가왔다. 강아지는 혀를 내밀어 재영의 검붉은 손을 핥기 시작했다. 머리를 갸웃댈 때마다 등의 털가죽이 움찔거렸다. 재영은 그것의 배 아래로 손을 넣어 살짝 들어보았다. 손바닥에 따뜻한 무게가 실렸다. 잔털은 얼굴을 묻고 싶을 만큼 부드러웠다. 그것의 양 겨드랑에 손을 넣어 들어올렸다. 그것의 표정이 바뀌었다. 무슨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혀로 제 코를 연방 핥았다. 재영은 그것을 들고 일어났다. 분홍색으로 깜빡이는 주둥이를 쳐다보았다. 꽃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그것이 재채기를 했다. 재영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것의 표정은 여전히 모르겠다. 그것은 재영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재영은 그것을 있는 힘껏 던지는 상상을 했다. 머릿속에서 그것은 꿈틀대며 날아간다. 그것은…… 재영은 재채기를 했다.


아는 사람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느 방향으로 걷든 의미가 없었다. 재영 자신이 내는 소리를 제외하면, 인공적인 소리는 전혀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재영이 만났다고 할 만한 것은 새와 나무와 풀과 벌레, 그리고 요 겨울과 봄 사이 대량으로 해방된 개와 고양이 들뿐이었다. 그 외엔 재영이 먹고 자고 뒹군 쓰레기들.

얼마나 걸었는지 그곳이 어딘지 아무 뜻도 없었다. 배고픔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재영은 만개한 개나리 덤불 앞에 멈추어 섰다. 덤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몸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머리를 연상시켰다. 재영은 다가가 삐죽 튀어나온 가지 하나를 훑었다. ‘이제 아무도 이런 것을 전정하지 않는다.’ 왜 하필 지금 이런 멍청한 생각이 드는 걸까. 샛노란 꽃잎을 입속에 한주먹 털어 넣고 몇 번 씹어보았다. 비린내가 입 안 가득 퍼지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반사적으로 턱이 끌어당겨지고 손끝이 뻣뻣해졌다. 어떤 행동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젖은 꽃들은 오그라들며 이빨과 잇몸, 혀와 볼 안쪽에 들러붙었다. 재영은 입을 다물었다. 무지막지한 뭔가가 입안에서 발버둥치는 듯했다. 향기 때문인지 현기증 때문인지 더는 서있기 힘들었다.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수그리자 고였던 침이 길 위로 늘어졌다. 목구멍으로 넘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구역질이 났다. 그때 누군가 재영의 등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곧 구원될 결심을 하고 있었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최후의 인간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길을 나섰다고 했다. 언제나 순서의 가장 마지막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최초와 최후이다. 이미 최초일 수 없게 되었으니 최후이고 싶다. 최후의 한 사람으로 ‘인류의 구원’은 비로소 완결되는 것이다. 마지막 인간이 되기 위해 구원의 날을 미뤄왔고, 아무도 만나지 않기를 바라며 무작정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신이 ‘완결자’가 아님을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으며, 길 끝에서 그 사람을 만날 것이라 또한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최후니 구원이니 완결자니 하는,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을 붙들고 매달리는 특유의 이야기.

“근데 그쪽은...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요?”

재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면 이해를 거부하는 건가요? 상관없어요. 당신이 최후의 인간인 것은 거의 확실해요. 당신의 눈빛을 보면 알아요. 나는 당신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겠어요. 그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나는 거예요! 한번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사람은, 그리고 그 생각이 실행되는 모습을 본 사람은 결국 이 길을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그의 말은 다른 ‘구원받은’ 이들과 같았다. 1과 1의 곱이 1임을 말하는 듯 망설임이 없었으며, 그것으로써 당신을 죽게 만들겠다는 열정이 담겨 있었다. 스스로 부재를 선택하는 것이 우리를 우주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조금의 공포도 없는 자기의 제거? ‘조금의 공포도 없는 자기의 제거, 이것이 진정한 의지의 행사입니다. 모두의 결론을 위한 자살,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은 질서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거부지요. 인간은 살아있는 한 자유롭지 않아요. 그렇죠?’ 그 대목에서 재영이 벌떡 일어나자 그도 덩달아 섰다. 그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금방 머리를 털고 뭔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재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역시 당신은 알고 있군요!”

“죽어 그냥.”

그는 그 말을 듣기를 기다렸다는 듯 급히 품속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삼켰다. 난 이제 괜찮아요. 그는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몸은 재영의 발밑에서 파들파들 떨다가 곧 잠잠해졌다.


재영은 몇 번인가 개나 고양이 따위를 잡아보려고 했다. 턱없는 짓이었다. 폐허를 제외하면, 인간에게 상냥한 것은 이제 조금도 남지 않았다. 풀과 나무들마저 위협적으로 잎을 흔들었다. 그것들이 재영을 거부하고 있음을, 재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은 사실인지도 모른다. 내가 최후의 인간일까?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을까? 지구에, 아니 이 우주에 인간이라고는 이제 나밖에 없는 걸까? 재영은 바닥을 보며 걸었다.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종족 전체가 자살을 택한다, 그것은 완전히 재영의 생각이었다. 재영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생각은 분명 재영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을 설명하는 데 쓰인 단어들이라니! 그런데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누군가 재영의 생각을 훔쳤다는 말인가? 아니면 우연히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그 쪽지는 아직도 있었다.


「우리 인류 전체가 스스로 부재를 선택함은 우리를 우주에서, 우리로부터 우주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조금의 공포도 없는 자기의 제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지이며, 자유로운 의지로 인해 발생된 유일한 행사이다. 모두의 결론을 위한 자살,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이. 이것은 질서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거부이며 질서의 정점이다. 이것이 해방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있는’ 한, 역사와 자연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수 없다. 인류로서의, 동시에 개인으로서의 의지의 행사가 인간의 결론이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행복하지 않을 역사로부터의 구원이다. 구원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전도하라. 그리고 죽으라. 타인이 절대를 증거한다. 우리는 서로를 구원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지구상에 최초로 구원된 종족이 탄생한다. 그것은 우리 류, 인류이다. 일단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사람은, 그리고 그 생각이 실행되는 모습을 본 사람은, 결국 이 길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이 진실은 1×1=1임을 전하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전해질 것이며, 듣는 이로 하여금 완성된 의지의 행동을 실행케 할 것이다.」


지금 보면 바보 같기 짝이 없지만, 당시의 재영은 그 생각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여겼었다. 재영의 저 깊은 머릿속에서부터 단어 하나하나가 길어올려지듯 나오던 때의 심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쪽지는 최초의 구원자가 나타나기 나흘 전에 쓴 것이었다. 최초의 구원자는 외국에서 태어났고, 그가 죽는 모습은 전 세계에 스트리밍되었다. 그 순간은 이제 영원히 잊을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고 재영은 빈 밥그릇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재열은 무릎을 모아 안고 있었다. 최초의 구원자가 말을 시작했다. 재영은 그게 뭔지 알았다.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거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지만, 문득 곧 전기가 끊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원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영은 종이에 ‘자신의’ 임시저장글을 삐뚜름하게 옮겨 적었다.

“……그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완성된 의지의 행동을 실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미소를 지으며 직접 자기 팔에 주사를 놓는다. 엄청난 햇빛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리고 있는 와중에도 여름옷을 입은 군중들은 그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다. 그와 군중 사이의 공간에 비둘기들이 내려앉아 있다. 아무도 그를 제지하려 들지 않는다. 주사액이 서서히 줄어드는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누가 찍어주고 있는 걸까? 그는 그 자리, 그러니까 사람들이 잔뜩 모인 광장에 흐트러짐 없이 누워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고, 번개가 친다. 새들이 날개를 치며 날아오른다. 딱 그때까지만 해도 사방은 고요하다. 정적이 너무 오래 지속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치 그때 모두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혼란은 시작된다. 기절하는 사람, 우는 사람, 사람들은 제각기 무어라 소리를 지른다. ‘이건 다 쇼야!’ 여기저기서 언성이 높아진다. ‘진짜 죽었다!’ 한쪽 구석에서 싸움이 터지고, 그들을 말리기 위해 여러 사람이 들러붙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누구 하나 그의 시체 쪽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대체 왜? 어디서 몇 명이 죽더라도 꿈쩍 않던 이들이, 우리가, 왜 그렇게 동요했을까? 그것은 모두가 하고 있던 바로 그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게 고작 두 달 전이었다. 이제는 재열도 나라도 없다. 인류는 재영을 빼놓고 다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재영은 발 닿는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아무렇게나 길을 가로질렀다. 얼마간 가던 길을 되돌아서기도 했다. 어지러웠고, 열이 났다. 어디를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은 뒤집히거나 일어났다. 길은 갑자기 떨어지기도 했고 갑자기 막히기도 했다. 길들은 갈라지고 합쳐지고 사라졌다. 길이 천천히, 녹색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도처에서 단내가 났다. 아무도 재영에게 말 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