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찾아낸 것 중 가장 많은 붙임이 있는 판본을 발견했다. 세어보진 않았다. 두툼하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가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재열의 것과 같은 간단한 메모가 가장 많다. 하경의 것과 비슷한 내용의 일기는 물론이고, 누가 썼는지도 모를 시들, ‘돌아온 최후의 인간’이란 제목의 패러디까지도 붙어 있다(최후의 인간이 시체들을 되살리는 내용). 심지어 그림도 있다. 어린애 낙서 수준(정말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정말 삽화라고 부를 만한 것들도 있다. 소동기는 붙어 있지 않거나 항상 마지막인 것으로 보아 가장 마지막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누구건 죽어 있었을 것이다. 각자의 가방을 옆에 두고.
나는 지금부터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분명히 전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다음부터는 뭔가를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초기에 붙은 하경의 일기를 빼면 이 정도로 멀쩡한 정신으로 쓰인 글을 본 적은 없을 것이다. 형주가 소동기 앞에 붙인다.
털어놓자면 겁부터 난다. 나도 처음엔 믿지 못하였거니와 당신에게는 따로 보일 것도 없고 오로지 이 글뿐이니 말이다. 아마 비웃을지도 모른다. 나를 미친놈 취급할지도 모른다. 그중 가장 큰 두려움은 당신이 이 사실을 거짓으로 믿을지도 모른다는 데에서 온다. 그러나 내가 안 것과 같이 당신도 언젠가는 알 수 있으리란 전망이다. (내가 ‘전망’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사용했음을 알아 달라.) 이하는 이게 다 왜 일어난 일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설명이다.
‘우리 종 전체가 스스로 부재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를 우주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일련의 관념은 지금까지도 계속 우리의 머릿속에 살포되고 있다. 자세히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나도 모른다. 이는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데 있어 가장 힘든 부분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이해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무조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어떻게’ 관념이 살포되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해할 능력이 없다. 나는 다만 사실을 알았을 뿐이고, 그것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나도 똑같이 물었었다. 관념을 ‘살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무슨 바이러스 같은 건가요? ‘그들 중 다른 하나’는 웃었지만(나는 그게 웃음이었다고 확신한다), 그래도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바이러스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선뜻 이해하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그러면 일종의 전파 같은 건가요? 메시지를 섞는다는 얘기죠?” “그건 공상적인 이야기지만, 그쪽이 효과 면에서는 더 가깝겠네요. 어쨌든 명백히 머릿속에 작용하는 겁니다. 언어 중추에 개입한다고 하면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분자 기계가 머릿속에 직접 적어주는 거죠.” 그들 중 다른 하나는 내가 이해하기를 포기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설명해줬다. 나는 지금도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른다. “어쨌든 이 기술을 사용한 지는 꽤 되었어요. 원시시대에나 벌어졌던 항성계 단위의 소모적인 대량파괴는 이제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당신들 인류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랬을 때는 우리뿐 아니라 당신들이 지구를 파멸시킬 가능성이 높지요. 그래서 바로 이런 종류의 물리력이, 정확하고 평화로운 물리력이 행사되는 겁니다.”
나도 처음 그 소릴 듣고서는 얼떨떨했다. 그때까지도 관념을 물리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분명히 밝힌다. 이것은 절대 공상과학이 아니다. 나도 물론 그런 영화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이제 (이 기나긴 배고픔과 고난을 거치며)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을뿐더러, 진실로 이 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저 말을 메모했기 때문에 여기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자전주기와 공전주기를 따르는 행성단위 관념살포의 작동을 따라, 첫 살포로부터 2년 하고 24시간이 올 1월, 첫 번째 희생자가 등장했다. 누가 처음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 의해서든 방아쇠는 당겨지게 되어 있으며 그때부터는 막을 수 없다. 부글부글 끓던 탕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의 생각이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어떻게 한 가지 결론에 모두가 도달할 수 있을까? 그것이 유일한 하나의 진실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왜 사는가, 자살하기 위해 산다. 답은 나왔다. 그리하여 집단 자살의 탈을 쓴 종족 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들 중 다른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엄밀히 말해 학살은 아니죠. 앞당긴 겁니다. 관념 살포를 방어할 만한 체제에 도달하지 못하는 종족은 어차피 스스로 사라집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시간 가속에 좀 더 가깝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내 말을 잘랐다. 당신 돌았군요, 좀 흥분한 것 같은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들은 누굽니까? 그들 중 다른 하난 또 누굽니까? 그렇게 말한 이들 모두 지금은 만날 수 없다. 나는 지친 채로 이걸 쓰고 있다. 그들 중 하나, 혹은 그들 중 다른 하나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나는 모른다. 그들은 물론 외계인이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들은 내게 ‘외계는 없다’고 말했다. 인간들 특유의 웃기는 얘기라고도. 내 생각에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안댔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는 별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한 가지를 제외하면 그들은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혹은 의미 부여를 보류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우주에 끝이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있었다. 그들 종족은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에 다같이 동의했으며, 또 확인 이후를 위해, 우주에 끝이 있다면 그것이 최대한 유보되어야 한다는 데에도 동의했다. 문제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아직 동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지성체들(끝에 대한 성급성은 ‘지성의 특질 중 하나’라고도 했다)이 우주에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편집증적인 집요함을 갖추고 우주의 끝을 앞당길 만한 패턴을 보이는 지성체을 찾아가 ‘중지’시키기 시작했다. 그들 앞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일방적으로, 혹은 반항 끝에 쓰러졌다. 우주 전쟁(그들은 ‘조정’이라는 단어를 썼다)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과 함께 작성되고 또 갱신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와중에 등장한 관념 살포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머릿속을 현실에 맞추는(그 반대가 아니라)’ 데 있어 가장 뛰어난 방법이었다. 초기의 접근은 화학무기로서의 신경증 유도제였다. 하지만 당하는 측에서도 대처가 가능하긴 해서 성과를 내는 데까지 너무 오래 걸렸으며, 우주 지성체들의 다양한 신경체계 때문에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고, 해당 행성의 다른 생물종도 건드린다는 점에서 ‘윤리적’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 자살 관념의 살포는 그 특성상 사회에 대한 거부 의식이 지배적인 문명일수록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였고, 이는 그들의 가깝고 먼 목표에 모두 부합하였다. 우리 인류는 그들의 분류에 따르면 손쉽게 처리 가능한 9급 지성체라고 한다. 실질적인 행성 공용어가 등장했으며, 하나의 절대관념 아래 인지도식이 종속되었다. (그 절대관념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들 중 다른 하나는 ‘더 큰 숫자’라고 했다.) 이는 행성 단위의 내전을 막 마친 초기 문명이 밟게 되는 여러 가지 경로 중 하나인데, 대부분은 자체적으로 초래한 행성상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쇠락하여 사멸한다고 한다. 그들은 예외 없는 결벽증을 발휘하여 가만둬도 십중팔구 멸종할 인류의 숨통을 확실히 끊기 위해 수천 대의 자살살포기와 함께 관리자 두 명을 지구에 보냈다. 내가 그 둘을 만난 것이 유월쯤이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산으로 갔었다. 산속은 내가 아는 가장 시원한 곳이었다. 당시 나는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매일 밤 풀벌레 소리 가득한 잠자리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다. 오로지 딱 한 명만 죽여보고 싶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나를 죽여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죽인 다음엔 맘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를 죽이는 것만은 참아낼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저 배가 고파서, 아니면 너무 더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한 것은 여러 의미에서 다행한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그들 중 하나가 머리맡에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는 내가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언제 이런 걸 만들어 놓았지? 내가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지? 그들의 외양을 묘사하는 일은 바보 같을 테니 관두겠다. 그들 중 하나를 보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진 끝에, 나는 잠시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 나는 휘두르고, 끊고, 물고, 밟았다. 나의 모든 구멍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내 내부의 압력이 바깥의 그것보다 높았다. 꼭 내가 터질 것 같았다. 땀과, 그들 중 하나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를 여기저기 흩뿌리는 가운데 하나의 확신이 육박해왔다. 확신은 나를 꽉 쥐었다. 나도 그 확신을 꽉 쥐었다. 넘치는 확신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나도 흘러내렸다. 그 확신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주 행복했다. 행복감에 젖어 잠든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들 중 다른 하나’가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죽은 그들 중 하나를 베고 누워 있었다고 한다. 내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뒤 그들 중 다른 하나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할 말이 거의 끝나간다. 이제 겁은 나지 않는다. 오히려 편안하고, 어떤 면에서는 허하다. 이런 말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써두기로 한다. 그 편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 중 다른 하나는 내게 살포기란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가 내게 말하고 있다는 현상만으로도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사람이 살포기 바로 옆에 서 있으면,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말을 마치고 조금 흥분한 기색(그들을 두고 이런 표현을 쓰기엔 조금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튼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으로 수많은 종잇조각, 아니 종이 더미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행성의 곳곳에서 이런 것들이 작성되고 있어요. 지금까지 이런 반응을 보인 종족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요. 나는 가능한 한 모두 읽어봤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당신들이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쓴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읽는다는 것도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어쩌면 항원반응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나는 결국 우리 종족이 모두 동의한 데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상한 가능성이 떠올랐죠. 어쩌면 우리 종족도 관념살포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게 아닐까?
그(죽은 그의 동료, 다시 말해 ‘그들 중 하나’)와 나는 계속 다퉜습니다. 나는 우리 종족이 우주 모든 곳에서 이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고, 그는 안 된다고 했지요. 나는 중앙통제장치를 부수고 혼자 나서서 직접 살포기 하나하나의 문구를 ‘아직 죽지 않을 것이다.’로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으니 그것이 최선의 길이었지요. 나는 도망쳤고, 그는 쫒아왔어요. 살포기들의 문구가 수십 번은 더 바뀌었을 거예요. 지금도 따져보면 거의 반반을 유지하고 있죠. 나도 그도 지쳐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를 죽였습니다. 이제 내가 나머지 반의 문구를 바꿔놓을 차롑니다. 당신들에겐 다행한 일이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좀 애석하군요. 그가 당신 옆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나는 그게 궁금해요.”
그리고 나는 그와 헤어지기 전에 그를 죽였다. 그렇게 해야 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고맙다고 말했다. ‘힘든 결정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를 용서하지는 않는다고도 말했다.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실행했다. 그의 몸은 차가웠다. 아니면 내가 그들보다 지나치게 뜨거운 것이었다. 내 손 안에서 부서지는 그를 보며, 그들의 몸은 어떤 우주복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지도 모른다. 껍데기(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에서 흘러나온 푸른 액체, 그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무에 뿌려진 액체는 순식간에 증발하며 희미한 자국을 남겼다. 나는 오래 그 자국을 보았다. 그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을까? 당신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이 혼란한 간극 사이에 채워 넣을 말을 찾지 못하겠다. 당신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당신은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내가 할 말은 다 했다. 내가 아는 사실들 중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을 모두 전했다. 이제는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으리라 믿는다. 우린 아직 죽지 않을 것인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