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제작

사람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만드는 이야기는 이 신화에서 유서가 깊고, 그만큼 여러 가지로 변주되어 왔다. 사람 제작의 핵심은 사람이 구성되는 일련의 과정 중 특히 생물적 과정을 분리하여 바깥으로 꺼내는 데에 있다. 사람 제작은 사람 출생의 맞은편에 위치한다. 이 신화에서 이루어지는 사람 제작의 여러 변주들이 각기 사람 출생의 교환물 자리에 무엇을 놓고 있는지 살필 수 있을 것이며, 그로부터 출생을 둘러싼 여러 시각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학보다는 존재론이다. 사람 제작은 지나치게 인류를 상기시키는 일이며,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나를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게, 우리에서 나로 다시 돌아가게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신화 속 제작된 사람들의 얼굴은 너무 심각해서 우스울 정도다. 속에서 나온 이의 입장에서는 실험실의 배양수조와 인간의 자궁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을 텐데 말이다. 사실 그들의 심각한 얼굴은 사람의 제작자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제작자들의 표정에는 사랑 대신 목표가 서려 있다. 저 비장함. 그런데 대체 뭐가 그리 심각하단 말인가? 출생한 인간과 구분되는 인간을 제작하려는 이들이 누구이며, 그들의 목표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람 제작이 남성적인 일인 한 그것은 언제까지나 진지한 비극이다. 고아 군인을 만들어 타국의 자식들을 죽이고, 전쟁 고아들을 또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 제작이 여성적인 일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자궁운반자 처지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아이아버지의 종말을 뜻한다. 그것은 부친살해의 새로운 판본이다. 아비 없이 낳은 자식의 군대로 장군을 죽여 전쟁을 멈추는 일이다. 사람 제작의 이면에는 항상 혁명적인 분위기가 서려 있기 마련이다. 기실 그것은 혁명 말고 다른 것은 거의 뜻하지 않는다.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생산하는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