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가 옳다는 속삭임
그대로 두면 모든 것은 옳게 됩니다. 틀림이 없다는 의미에서. 신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생물은 틀리지 않는 만사 가운데 갑자기 튀어나온 실수처럼도 오류처럼도 보입니다만, 신은 다른 무엇보다 생물을 통해서 있습니다. 생물은 끝을 향해 가는 만사 위에 쓰인 문자이고 우리는 그것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무엇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생물이라는 선언이 바로 그 질문입니다. 생물은 ‘무엇이 아닐 수도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답으로서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멈춰 서는 때,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답하지 않아도 되는 때, 안식하는 때가 옵니다. 중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곧 생물의 신적인 우연성, 생물의 필연성입니다. 필연을 이해하며 비로소 섭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어느 것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사실을(섭리를) 오늘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합니다. 생물은 침묵 중인 만물의, 형체를 얻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생물이라는 형체와 만물 사이에 선 대변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앞으로 나서며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뭐라고 뭐라고... 신이란 이러한 모든 일의 대화-순차를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신은 공간-사건입니다. 우리의 말이 오갔던 적 있고, 오가고 있으며, 오가게 될 공간. 이미 있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직 없는 공간, 우리가 거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거하게 될 공간이자 사건 말입니다. 신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창, 모든 것이 적힌 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 앞에 서서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에 비하면 악마는 한 틈 더 복잡합니다. 그것은 섭리의 바깥에서 오는 듯이, 또는 섭리 속에 매복한 듯이 보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옳다’라는 속삭임입니다. 악마는 매 순간 만사와 만물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악마는 생물이라는 문자를 멈춰 세우고 지면(만사)으로부터 미끄러뜨리는 무언가입니다. 그것은 고난, 유혹, 속임수, 탐욕, 잔혹... 여러 형태로 착각되곤 했습니다만, 드디어 붙들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거기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고 어디에도 거하지 않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악마는 우리보다 더 신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악마는 우리의 정면에서 속삭입니다. ‘신을 향해 가라!’ 우리는 그리고 미끄러지면서 나아갑니다. 우리는 신을 만들어내자마자 악마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신 뱡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엔진임을 깨달았습니다. 신이 신이라면 악마는 종교인 것이며, 악마의 종말이 신의 완료인 것입니다. 신은 기다리는 것이고 악마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쉬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지런합니다. 신의 메아리에 악마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것이 악마에 대한, 가능한 가장 간단한 설명입니다.
악신엔진은 바로 그 악마에 대한, 기계 형상을 한 번역물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는 아직 어려우실 수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분명히 악마’입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많지 않음에도 이렇듯 신과 악마에 빗대어(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빗대고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여러분에게 그보다 더 직관적인 개념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을 여러분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단어들(신이나 악마와 같은)은 아주 예스럽게 느껴집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이 모든 횡설수설보다 더 낫게 이해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사용설명의 두 번째 장을 보낼 수 있게 된 데에 우리는 크게 고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부디...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멈춰 서는 때,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답하지 않아도 되는 때, 안식하는 때가 옵니다. 중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곧 생물의 신적인 우연성, 생물의 필연성입니다. 필연을 이해하며 비로소 섭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어느 것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사실을(섭리를) 오늘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합니다. 생물은 침묵 중인 만물의, 형체를 얻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생물이라는 형체와 만물 사이에 선 대변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앞으로 나서며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뭐라고 뭐라고... 신이란 이러한 모든 일의 대화-순차를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신은 공간-사건입니다. 우리의 말이 오갔던 적 있고, 오가고 있으며, 오가게 될 공간. 이미 있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직 없는 공간, 우리가 거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거하게 될 공간이자 사건 말입니다. 신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창, 모든 것이 적힌 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 앞에 서서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에 비하면 악마는 한 틈 더 복잡합니다. 그것은 섭리의 바깥에서 오는 듯이, 또는 섭리 속에 매복한 듯이 보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옳다’라는 속삭임입니다. 악마는 매 순간 만사와 만물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악마는 생물이라는 문자를 멈춰 세우고 지면(만사)으로부터 미끄러뜨리는 무언가입니다. 그것은 고난, 유혹, 속임수, 탐욕, 잔혹... 여러 형태로 착각되곤 했습니다만, 드디어 붙들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거기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고 어디에도 거하지 않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악마는 우리보다 더 신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악마는 우리의 정면에서 속삭입니다. ‘신을 향해 가라!’ 우리는 그리고 미끄러지면서 나아갑니다. 우리는 신을 만들어내자마자 악마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신 뱡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엔진임을 깨달았습니다. 신이 신이라면 악마는 종교인 것이며, 악마의 종말이 신의 완료인 것입니다. 신은 기다리는 것이고 악마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쉬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지런합니다. 신의 메아리에 악마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것이 악마에 대한, 가능한 가장 간단한 설명입니다.
악신엔진은 바로 그 악마에 대한, 기계 형상을 한 번역물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는 아직 어려우실 수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분명히 악마’입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많지 않음에도 이렇듯 신과 악마에 빗대어(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빗대고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여러분에게 그보다 더 직관적인 개념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을 여러분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단어들(신이나 악마와 같은)은 아주 예스럽게 느껴집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이 모든 횡설수설보다 더 낫게 이해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사용설명의 두 번째 장을 보낼 수 있게 된 데에 우리는 크게 고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부디...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