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뱃갑

그 동네 살 때 처음으로 심부름을 다녔어. 유독 기억나는 건 담배 심부름이야. 대문을 나서면 길은 세 갈래, 오른쪽으로는 언덕을 내려가고 왼쪽으로는 언덕을 올라간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가는 길, 그 길로 가면 아주 허튼 놀이터가 있었지. 놀이터에 가려는 건 아냐. 담배를 사려면 언덕을 내려가야 해. 언덕을 내려가면 또 갈래, 오른쪽은 올라가고, 왼쪽은 내려간다. 구멍가게는 그 갈래 사이에 있어. 거기까지 가는 데 5분도 안 걸려. 들어가고, 인사해. 인사를 하라고 배웠어. 처음 인사 배운 일이 기억나. 안녕하세요 해야지, 나는 안녕하세요 해. 맨 처음엔 말은 제대로 못하고 허리만 꾸벅했던 것 같아. 어쨌든 말은 하게 되어서, 안녕하세요, 하고 담배 이름, ○○ 한 갑 주세요 말해. 처음 담배 심부름 배우던 때도 기억나. ○○ 한 갑 주세요, 하면 돼. ○○ 한 갑 주세요 하면 돼? 그래. ○○ 한 갑 주세요? 응. ○○ 한 갑 주세요?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물었던 것 같아. ○○ 한 갑 주세요. 주인은 한 갑을 검은 봉지에 담아서 줘. 나름의 배려지. 담배를 받은 나는 돈을 내밀어. 주인은 돈을 받고, 나는 안녕히 계세요 해. 주인은 응 가라 하지. 안녕히 계신 줄 다 보이는데 왜 따로, 볼 때마다 물어봐야 하는지 그때는 궁금했어. 어머니한테 안녕이 무슨 뜻인지 물어봤었거든. 안녕- 하면 별 탈 없이 편안하다는 뜻이고 안녕하지 않다는 건 편안하지 않다는 뜻이야. 짧은 말에 어떻게 그렇게 긴 뜻이 있어? 왜 계속 안녕한지 물어봐? 그냥 인사야. 인사로 물어보는 거야. 인사는 왜 해? 어머니를 꽤 귀찮게 했어. 이런 얘기는 재미가 없을까?

상관없어요. 재미로 듣는 게 아니니까요.

좀 서운한 소리네. 좋아. 나는 검은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와. 날은 어쩐지 맑아. 나는 심부름하던 날을 다 맑은 날로 기억하고 있어. 맑은 날에만 심부름을 보냈던 거야. 맑았던 것만이 아니라, 그때 나는 여지없이 교회를 다녀온 상태고, 아버지는 그날 집에 있었던 아버지야. 그 일이 반복돼. 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자꾸 무슨 뜻인지 알겠냐고 묻는 걸 용서해줘.

물론이에요. 매주 일요일 교회에 다녀오면 집에 있던 아버지가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는 얘기죠?

맞아. 하지만 좀 더 뜻이 있지. 그것까지도 알겠어?

당신 아버지는 일요일에 쉴 수 있었군요.

좋은 이야기야. 더 뜻이 있을까?

제가 당신 대신 생각해주길 바라는 건가요?

어느 정도는.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요?

그래. 그랬을 거야. 아마 좋진 않았을 거야.

교회에 대해 얘기하고 싶나요?

지금은 아냐. 오늘은 담뱃갑 이야기를 할 거야.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약간 흥분된 맘으로 봉지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뱃갑은 비닐로 정교하게 싸여 있다. 모서리가 뛰어나게 정돈되어 있고, 흰색과 푸른색이 섞여 있고, 안에는 뭔지 모를 것이 들어 있는데... 너도 이제는 알겠지만, 나를 조금은 알겠지만, 당연히 나는 그걸 좋아했어. 피마자 열매를 좋아했듯이. 그 담뱃갑의 겉을, 모양과 단단함, 색깔, 그런 것들을 좋아했지. 돌처럼 단단하지는 않지만, 선명하고 탄탄하고. 담뱃갑을 열어 그 안의 담배를 피워 보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야. 그때는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어. 그게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지. 그런 점에서 그건 열매와는 또 달랐어. 인간이 만든 것, 인간이 여는 것...

지금 왜 울고 있는지 제가 알 수 있나요?

말하고 싶지 않아. 지난 일주일 동안은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맞을까? 너, 그러니까, 내가 너라고 믿고 있는 것 말이지, 그러니까, 너는 혹시 사람이 아닐까? 들어봐. 너와 얘기를 마치고 이 건물을 나설 때, 항상 같이 마주치는 사람이 있어. 처음엔 그 사람이 나와 같은 처지일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지난주에 갑자기, 혹시 저 사람이 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 사람의 눈빛을 보고서.

그 사람의 눈빛이 어떻던가요?

나를 안다는 듯한 눈이었어.

그랬나요? 하지만 그 사람도 당신에 대해 그렇게 느꼈다면?

됐어. 어떻든 상관없어. 네게도 냉정한 면이 있구나.

좋아요. 좋아요. 난 당신이 또 하염없이 울다 가게 두고 싶지 않아요. 이번 얘기는 어떻게 끝나죠?

아무렇게도 안 끝나. 오늘은 끝나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담뱃갑을 꺼내서 햇빛에 비춰봐. 빛이 네모 모양으로 반사돼. 마름모로, 선으로, 다시 네모로.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언덕을 올라가. 이 손가락 저 손가락으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잡아 보면서. 배경의 하늘은 몹시 푸른색이야. 대문 열기 전에 다시 그걸 봉지에 넣고, 봉지에 넣은 채로 아버지에게 줘. 두 손으로. 아버지는 응 그래, 하지. 거기까지야. 담배 심부름은 한참 이어졌어. 그 동네에서 떠난 다음까지도. 다음 집 근처의 다음 슈퍼에서까지도. 아버지는 결국 담배를 끊었지. 나도 담배를 끊었어.

왜 끊었어요?

아버지가 먼저 끊고, 제발 너도 끊으라고 해서, 나도 끊었지. 이건 또 무슨 뜻일지... 이 얘긴 이제 됐어. 너도 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때 담뱃갑을 보면서 말이야, 나는 우주선을, 우주선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우주선을 생각했어. 주일의 맑은 하늘을 향해 쳐들고서. 담뱃갑을 쳐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