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네가, 내가 기필코 막아야만 하는 무엇이었으면 좋겠어. 차라리 네가 악한 것이라면. 너를 쓰러뜨려 우리의 곤궁이 다 해결된다면 좋을 텐데.

그 말은 슬프게 들려. 쓰러뜨려지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래. 그럴지도 몰라. 세상이 싫어. 다른 이야기를 하자. 눈 오는 날 이야기야. 눈이 오고 있으니까. 그 동네에서 눈 오던 날 생각이 나. 눈이 오면 온 동네가 조용해졌다. 개들만이 짖었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개들만. 그러면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들어. 마당 구경을 하면서. 배경으로 눈이 오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지. 눈은 조용히 왔어. 검은 나무들도 생각이 난다. 가지만 남은 검은 나무들이 눈 오는 배경의 배경에 있다. 주인집 개는 그때 어디 있었을까? 모르겠어. 너무 늙어서 눈에 대고 짖을 힘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고. 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그리고 어머니는 눈 오는 날 마당을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당에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가 그 고양이를 봤대. 나도 고양이를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아. 정확하진 않지만. 그리고 고양이도 나를 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려. 귀를 씻어. 바닥에 굴러. 그런데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내가 그 고양이를 따라했다는 거야.

어째서?

나는 모르지. 하지만 알 것 같지 않아? 어머니는 그 장면을 종종 이야기했어. 어머니는 그게 좋았던 거야. 잊을 수 없었던 거야. 그 장면을. 이건 어머니를 대신해 너한테 말하는 셈이야.

그래... 네가 지금 고양이인 셈이네.

네가 눈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지. 검은 가지들일 수도 있고. 들어 봐. 계속 생각이 나. 말했듯이 그 동네는 언덕 그 자체였어. 비탈이 많았지. 쌓인 눈을 얼른 치우지 않으면 안 돼. 어른들은 집에서 흰 연탄을 들고 나와 던져놓고 밟아 부수고 뿌렸어. 연탄 말이야. 맞아. 연탄 보일러 옆에서 눈 내리는 마당을 봤던 기억이 나. 검은 연탄을 다 태우면 흰색이 돼. 그럼 연탄집게로... 연탄집게는 철근으로 만든 거 같았는데... 연탄광에서... 잠깐, 무슨 얘길 하고 있었지?

고양이?

아, 언덕! 눈 내린 날에는 어른들이 연탄 깨러 나오기 전에 얼른 집 앞으로 나가. 나는 비닐 자루를 들고 있어. 어떻게 그런 게 내 손에 들려 있는 거지?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지? 어떤 부분들은 신기할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아. 하여튼 그걸 깔고 썰매를 타. 썰매 타기 딱 좋은 비탈이 바로 집 앞에 있었어. 얘기했나? 알겠어? 눈 쌓인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야. 다 내려가면 다시 비탈을 올라. 오를 때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미끄러지지 않게 발가락에 힘을 딱 주고. 혼자 탔었나? 몰라. 그런 것도 기억이 안 나. 눈을 쓸기 전에 다 눌러 놓는 거니 좋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딱히 누가 막지는 않았던 것 같아. 눈 그치고 동네가 다시 점점 소란해질 때쯤 집으로 돌아왔어.

좋아. 그 일이 재밌었던 거야? 미끄러져 내려가는 일이?

그래. 당연해. 그 일의 뭐가 재밌는 걸까. 너도 타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한참 타다가 집에 와서 신발을 벗으면 양말이 젖어 있어. 발끝이 어둡게. 그 발이랑 손을 이제 따뜻한 이불 속에 넣는다는 거지. 그래. 그거야. 거기까지가 좋은 거야. 아, 또 이런 일도 있었어. 눈이 녹는 때야. 아마 삼월이나...

괜찮아?

물론이야. 난 괜찮아. 고마워. 눈이 녹는 때, 초봄이 되면 동네에 꼭 오는 사람이 있었어. 양복을 입고, 양복을 입고 그 동네에 오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장난감을 파는 사람이었어. 외판원이었지. 장난감이 든 커다란 상자를 낑깅대면서 보란 듯이 들고 다녔어. 그 상자도 기억이 나. 흰 바탕에 색색의 블럭 사진. 노랑, 빨강, 초록, 파랑이야. 그 사람이 파는 장난감을 가진 친구네서 겨우내 놀다 오기도 했어. 거기서 내가 살다시피 하니 봄이 되면서 어머니가 뭔가 결심한 거지. 그 봄에, 외판원은 드디어 우리집에 온다. 눈이 아직 다 녹지 않았을 때야. 대문이 열리고 외판원이 들어온다. 웃으면서 그 사람은 나한테 인사해 줘. 주인집 마당을 지나 우리집으로 안내받아. 그가 벗어놓은 구두가 기억난다. 어머니와 그 사람은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지능 개발이 어쩌고 하는 소리야. 나는 보일러 옆에서 안방을 들여다봐. 무릎 꿇은 그 사람의 양말이 젖어 있어.